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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부대’의 상식초월 기자회견

20살, 대학교 1학년 때다. 동아리방에서 빈둥거리던 나에게 한 선배가 책 한 권을 던져줬다. “고등학교 땐 못 봤을 거야. 함 읽어봐.” 제목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첫 문장부터 짜릿했다. “A spectre is ..

노약자석, 미덕인가 악덕인가.

노약자석, 美德인가 惡德인가. 작년 10월,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약자(弱者)”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허리환자가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자리를 빼앗기는 과정을 '처절하게' 그린 글이었다. 많은 분들이 추천과 댓글을 남겨주셨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20살, 대학교 1학년 때다.

동아리방에서 빈둥거리던 나에게 한 선배가 책 한 권을 던져줬다.
“고등학교 땐 못 봤을 거야. 함 읽어봐.”

제목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첫 문장부터 짜릿했다.

“A spectre is haunting Europe.”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20년 동안 갇혀있던 ‘플라톤의 동굴’에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보면 볼수록 몰입됐고,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가슴이 뛰었다.
‘진리’가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독서에 열중하던 내게 선배가 다시 말했다.
“20대에 공산주의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 자본주의가 아닌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이미 반은 읽은 것 같은데, 넌 아직 책이 읽혀지니? 정상적인 20대라면 서문만 읽고도 가슴이 벅차 밖으로 튀어나가야 하는데. 이 친구, 아직 가슴이 없는 젊은이구먼.”

나는 곧바로 책을 덮고 선배를 따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은 더 이상 내 가슴을 뛰게 하진 않는다. 아직 40대의 ‘머리’가 생기진 않았지만, 20대의 ‘가슴’은 사라진 듯 하다.

그 ‘가슴’이 사라지기까진 대략 7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세월이 아깝지는 않다. 그 모두가 내겐 참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만 그 후 달라진 건…

지금은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는 책을 접해도 일단 ‘끝까지’ 읽어본다.
책을 다 읽고도 답을 얻지 못하면 전문가에게 ‘물어본다.’
전문가가 없으면 다른 책을 찾는다. 책을 못 찾으면, 인터넷을 뒤져본다.

참 좋은 세상이다. ‘노력’만 하면 누구나 얼마든지 정확한 자료를 구할 수 있다.
20살엔 ‘진리’가 내 눈을 뜨게 했지만, 지금은 ‘사실’이 내 가슴을 뜨겁게 한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라. 그러면 진리를 찾을 것이니.”
요즘 제일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오늘 오전 카페 '유모차 부대' 회원들이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유모차부대의 눈물 "풍선까지 증거제출 하라니..." (오마이뉴스 08.09.22)

기자회견문 전문을 읽어봤다.

실망이었다.

“저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누구인지, 여당, 야당의원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엄마들이었습니다. 내 자식이 감기만 걸려서 열이 올라도 함께 잠 못 자가면서 절절매던 엄마들이 왜 아이들을 업고, 안고, 유모차에 태우고 거리로 나오게 되었습니까?

심지어 저녁뉴스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내 아이의 옹알이에 눈맞추고 즐거워하던 엄마들이 왜 멀리 지방에서조차 힘들게 아이들 기저귀가방까지 들춰 매고 서울까지 와야만 했습니까? 인터넷을 켜놓고도 아이들 예쁜 옷이나 맛있는 먹을거리를 살피며 아이쇼핑이나 즐기던 엄마들이 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기자회견 전문 중에서)

20년 전 동아리방에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쇼핑’이나 즐기던 엄마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뛰쳐나온 것이다. 그것도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이들은 스스로 ‘정치에 관심이 없던’ 엄마들이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군지도 몰랐단다. 저녁뉴스도 안 보던 엄마들이다. 그러던 중 광우병 사태를 보고선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정보를 취합해 얼마나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얼마나 이해를 했을까.

다 좋다. 지역구 의원조차 몰랐다던 엄마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셨으니.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가지고 장난치는 정부를 누가 그냥 두겠는가. 당연히 뛰쳐나가야 한다.

문제는 왜 유모차를 끌고 나갔냐는 것이다.
조금 양보해서, 아이 돌볼 사람이 없어 끌고 나온 것도 좋다. 엄마의 자유니까.
그런데 왜 스스로 ‘유모차부대’라 부르며 시위대의 선봉에 서려고 했나.

'살수차로 목욕하러 나온' 엄마 (사진출처 : 머니투데이)

또, 유모차부대의 회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의에 의해 유모차를 끌고 나와 단신으로 새벽까지 남아서 살수차를 막은 것이 어찌하여 탄압을 받아야할 대상인가요? 

경찰의 시민을 향한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무자비한 물대포를 시민들을 위해서 유모차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막은 것이 "일반교통방해" 혹은 "공무집행방해"이던가요? 경찰 스스로가 위험한 살상무기를 사용하였기에 그것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절대 탄압을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자회견 전문 중에서)

기자회견문에 따르면, 이들은 “유모차부대의 이름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을 때는 한 번도 물대포나 강경진압의 위험한 상황에 노출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와중에 “일부 따로 남아서 개인행동을 한 사람들의 행동까지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폭력 시위 현장에서 목격했던 ‘유모차부대’라는 깃발은 뭘까.
시위 선봉대에 서서 자신의 유모차를 앞세우던 그 당당하던 엄마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아무리 내 아이의 건강과 식품 안전이 중요하다 해도,
그 이름이 ‘유모차부대’라고 불리는 순간, 그 조직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진짜 내 아이의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다면, 혼자 나왔어야 했다.
어느 정도 큰 아이라면,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참교육’은 가능했겠지만,
이건 완전 ‘유모차’를 앞세운 ‘부대’가 됐으니, 진짜 엄마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일부 네티즌들은 ‘계모열사’라는 말을 붙이기도 했다.)

‘소총부대’는 소총이 주무기인 부대다.
‘기갑부대’는 전차와 장갑차 등 기갑병기를 ‘무기’로 삼는 부대를 말한다.
‘포병부대’는 화포를 무기로 삼는 부대다.

‘유모차부대’는 유모차를 ‘무기’로 삼는 ‘부대’다.

지난 6월, 서울 세종로는 ‘전쟁터’였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무자비한 물대포”가 뿌려지는 곳이었다.

엄마들이 자랑스런 발걸음으로 ‘參戰’했다. '살상무기'가 가득한 곳으로. 주력무기는 ‘유모차’.

난 처음 ‘유모차부대’라 하길래, ‘유모차를 타고 나온 촛불부대’를 말하는 줄 알았다.
당연히 ‘아이’는 없었어야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유모차부대를 보고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우리는 무적의 유모차 부대”라면서 자신의 아이를 당당하게 앞세운 그들의 ‘怪力’이 충격적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전쟁터로 나서는 것은 '勇氣'가 아니라 '狂氣'다.

다 좋다. 책 서문만 읽고 뛰쳐나오는 것도 좋다. TV 뉴스 머리말만 보고 촛불을 드는 것도 좋다. 신문 사설보고 속는 것도 할 만 하다. 인터넷 서핑 몇 일하고 ‘검역주권’을 외치는 것도 바람직하다.

모여라, 외쳐라, 촛불을 들어라. 내 가슴이 뛰고 있는데, 언제까지 집에서 ‘아이쇼핑만 즐길 수’ 있겠나. 다만 어린 아기는 안전한 곳에 맡겨두고 와라.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구치소’라도 간다면, 이들은 그곳에도 유모차를 끌고 갈까? 경찰의 ‘말도 안 되는 탄압 수사’에 맞서려면 그들의 무기가 반드시 필요할 텐데 말이다. 의문이다.

유모차부대여, 그대들이 진정한 ‘엄마’들이라면, 아무리 내 아이의 ‘안전한 먹거리’가 중요하더라도, 유모차는 절대로 앞세우지 말라.

세상의 모든 아기는 그보다 우선하는 권리가 있다.

‘엄마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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