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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7.04.04 데카르트의 ‘성찰’, 매트릭스, 기독교 (3)
  2. 2006.10.07 로스트 시즌 3 에피소드 1 (3)
  3. 2006.09.26 공산당선언, 그리고 기독교
‘유모차부대’의 상식초월 기자회견

20살, 대학교 1학년 때다. 동아리방에서 빈둥거리던 나에게 한 선배가 책 한 권을 던져줬다. “고등학교 땐 못 봤을 거야. 함 읽어봐.” 제목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첫 문장부터 짜릿했다. “A spectre is ..

노약자석, 미덕인가 악덕인가.

노약자석, 美德인가 惡德인가. 작년 10월,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약자(弱者)”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허리환자가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자리를 빼앗기는 과정을 '처절하게' 그린 글이었다. 많은 분들이 추천과 댓글을 남겨주셨다...

성찰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문예출판사



데카르트의 ‘성찰’


 

우리가 먹는 치킨의 맛을 기계들이 어떻게 알고 그런 맛을 낼 수 있는 거지? 혹시 진짜 치킨은 다른 맛이 아닐까? 만일 우리가 진짜 치킨을 먹는다면 그 맛이 정말 매트릭스에서 먹었던 그 맛이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거지?

영화 <매트릭스(What is the Matrix)> .

 

데카르트(Ren Descartes)성찰 읽기를 6일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마친 후 지속적으로 나에게 떠오른 생각은 모두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 관한 내용이었다. 물론 매트릭스라는 일개 영화와 오랜 시간 한 문장씩 고민하고, 의심을 품고, 이해하고, 생각해야 할 위대한 철학을 비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접근일 수도 있지만, 현재 나 자신의 철학적 한계와 그 절차적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는 현실적으로 나의 수준에 충실한 해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필자는 다소 불확실하고 모호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존재에 관한 탐구와 그의 연구에서, 최대한 구체적 예인 영화 <매트릭스>와의 비교를 통한 또 하나의 성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데카르트의 첫째 성찰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가능성과 기존의 사고를 의심함으로써 시작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각과 행동을 또는 허위로 가정하고 이 모든 근원적 지식 또는 진리에의 의심으로부터 그의 철학적 성찰은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극단적 의심은 당시 예수회의 피에르 부르댕(Pierre Bourdin)에게서 비판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변은 실제적인 삶의 영역에 결코 전이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이고 과장된 것으로서의 극단적 형태의 회의를 문제 삼고 있으며, 무엇이든 최소한의 의혹이라도 일으킬 수 있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런 유형의 회의를 말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생각해 낸 첫째 가능성은 생시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Morpheus)가 네오(Neo)에게 최초로 매트릭스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정확하게 묘사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인식하는 모든 것들, 즉 보는 것, 듣는 것, , 냄새, 느끼는 것, 오감을 통해 우리의 생각으로 전해지는 것이 모두 조종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가 내린 사실적 결론은 단순하다. 인간의 모든 감각과 생각이 기계, 즉 매트릭스에 의해 통제 되고 있고, 네오는 이를 초월하여 인간의 해방(구원)을 위해 싸우는 선택 받은 자라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의식적인 경험 전체가 꿈속의 경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의식적인 경험을, 사물들이 경험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믿을 만한 지침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1]

둘째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그에게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악령에 대한 가설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자신의 생각하는 의지와 관련하여, 현재 의심하고 또한 믿는 것 자체는 강력하고 교활한 악령에 의해 조종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이는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이고 꿈속의 경험이더라도 생각하는 사유 그 자체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첫째 성찰의 일부분을 철회한 것이며, 선험적 자아(transzendentales ego)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된다.[2] 이런 형이상학적 내용들은 다시 영화 <매트릭스>로 돌아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성찰에 이르러 데카르트와 <매트릭스>는 조금 다른 내용을 펼치는데, 데카르트는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교활한 악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악마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것 또한 '우리'가 있다는 결론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영화 <매트릭스>는 속임을 당하는 그 '우리'조차 악마가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는 가정으로 데카르트의 논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는 결코 인간 존재를 부정하진 못한다. 주인공은 매트릭스 시스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악마'의 부속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그 '매트릭스'의 탄생 역시 실재(實在)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3]

이와 같이 전체 성찰 중 둘째 성찰까지는 영화 <매트릭스>와 큰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 성찰 자체에 대한 내용을 전개해나가기 위해, <매트릭스>에 관한 관련성은 여기에서 잠시 줄이기로 하고, 다시 성찰로 돌아와 데카르트의 보다 깊은 철학에 관해 알아보자.

셋째 성찰은 데카르트의 전체 성찰 중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다. 데카르트가 신에 관한 자신의 관념이 실재하는 어떤 존재에 관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바로 셋째 성찰에서이다. 이것은 앞서의 이틀간의 성찰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첫째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그가 실재로 존재하는 그 어떤 사물에 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기로 작정한다. 그는 물질적인 대상들에 관한 자신의 모든 신념을 거짓으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심지어 단순한 물질적 본성들의 실재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조차도 거짓으로 보아 거부한다. 여기서 그는 기만적인 악령이라는 회의론적 가설을 끌어들인다. 둘째 성찰에서 그는 악령에 의해 기만당하기 위해서는 기만할 매개적인 수단, 즉 생각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며, 만일 생각이 있다면 생각하는 자, 즉 그 자신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해서 첫째 날의 묵상에서 야기되었던 의심의 폭은 조금 줄어든다. 그러나 신의 현존을 확립한 후에야 비로소 그는 그 자신과 그의 생각이나 관념들 너머에 실재하는 사물들을 믿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4]

데카르트는 신은 완전하고 또한 지극히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신중한 자세로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명제를 거짓으로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신은 우리를 창조하면서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까지 속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지는 않았으므로, 정신이 사물들과 이들의 연관을 실재적인 것으로 인식한다는 사태는 그런 것들이 사실에서도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그는 여섯째 성찰에서 결국 물질적인 대상의 실재성과 단순 본성들의 실재성을 의심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물질적인 대상들의 실상이 감각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그것들의 수학적 속성은 명확하며 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는 이로부터 수리 물리학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5]

지금까지 성찰의 전체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처음 몇개의 성찰은 영화 <매트릭스>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았고, 나머지 성찰은 톰 소렐의 분석에 따라 정리하였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 자체가 워낙 심오한 내용이고, 각각의 성찰을 말그대로 하루하루 이해하기엔 그 과정이 너무나 방대하다. 원래 한 성찰을 계속해서 되씹고, 묵상하라고 지은 것이기에, 보다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합리론의 창시자이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절대로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 사색(성찰)을 시작하였고, 그가 사용한 방법은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철저히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 방법적 회의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의 방법서설에서 이미 논의되었으며, 결과적으로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창출하게 된다. 이는 철저한 이원론으로 발전하여, 이후 스피노자 등에 의해 철저히 비판을 받게 되지만, 그가 시도한 철저한 의심으로부터의 성찰은 신과 자아의 관계 속에서 합리적 사고를 통해 그의 존재를 증명함으로 큰 의미를 갖게 된다.[6]

 

이제 기독교적 관점, 즉 성경에 근거한 진리로써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앞서 여러 철학자 들과, 영화, 그리고 비평가들에 의해 분석된 데카르트의 성찰은 결국 그 글의 목적인 신의 존재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그 텍스트인 성경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 자체를 전능자로 규정하고, 모든 인위적, 상대적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이러한 전제는 하나님을 단순히 유일한 절대적 존재인 신으로 한정시키는 모순을 가져오게 되어, 성경에서 분명히 묘사된 감정을 가지신,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노하시는, 후회하시는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모든 근원적 능력을 가진 기계적 존재로 그 증명을 마무리 하였다.

물론 필자의 짧은 소견과 정확하지 못한 이해로 인해 이러한 평가가 나왔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성경에 근거해서 볼 때,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존재이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는 절대적 주권과 역사하심을 가지고 계시므로, 인간에게 그 의지를 양보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소유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을 존재적 논리로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향해, 고린도전서 한 구절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2)





[1] 영화 매트릭스 관련 내용을 제외한 데카르트의 첫째 성찰에 관한 내용은 Tom Sorell, 문창옥, 데카르트 (서울; 시공사. 1999) pp.92~93

[2]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이러한 데카르트 철학을 기초로 ‘선험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 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현상학으로 변형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에드문트 후설, 오이겐 핑크, 이종훈 역, 데카르트적 성찰, (서울; 한길사, 2002.)

[3] 인터넷 블로그 자료 http://blog.naver.com/hrinnal/140012930688, (2005 109)

[4] Tom Sorell, 1999, pp.87~88

[5] Tom Sorell, 1999, pp.88~89

[6] 이원복, 신의나라 인간 나라 (서울; 두산동아, 2003) pp.149~153




성찰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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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시즌 3 에피소드 1

TV Show 2006.10.07 23:09 Posted by 스물다섯
드디어 시작된 로스트 시즌 3.

시즌 3 첫화를 본 후의 소감은 일단 만족. 시즌 2 첫 에피에서 이미 엄청난 쇼크를 받아서일까, 왠지 한번쯤은 큰 변화를 기대했는데, 그들의 첫 등장 장면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앞서 본 에피 00, 지금까지 로스트의 스토리를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다. 보면서 느낀 것은 역시 로스트는 한꺼번에 보는게 제맛이라는 것.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나의 호기심이 너무 크다.


이번 시즌의 첫 장면에서부터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위의 추락 장면이 아니라, 북클럽에서의 줄리엣이 말한 대사였다. 물론 갑작스런 사건으로 말이 끊기긴 했지만, 분명히 등장한 한 단어, '자유의지, Freewill' 이다.

나는 로스트를 항상 몇가지 코드로 분석하면서 보는 것을 즐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언급한 자유의지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예언', '성취', '신앙', '실험', '심리', '종교', '상황', '철학', 등을 항상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선 자유의지는 로스트 초반부터 큰 의미를 둔다고 생각한다. 일단 서구 철학의 핵심인 기독교에서의 자유의지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부터 많은 논쟁을 불러온 중요한 요소이다. 5세기 경부터 시작된 펠라기우스와 그 후 일어난 알마니안과 칼비니즘간의 논쟁, 자유의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있어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로스트의 철학적 의미에서 이 자유의지를 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드라마의 전체 구조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각 에피소드는 등장인물의 회상과 현재의 행동을 서로 연관시켜 전개된다. 그냥 단순하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고, 또한 복잡하게 연결된 관계들이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초자연적 권력에 의한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사건이 각 등장인물의 과거와 서로 얽혀, 현재의 행동을 100% 완벽하게 조종할 수도 있다. 물론 100%는 일단 초자연적 권력이 신이라는 가정일 때 가능한 것이다.

물론 The Others들이 죽기도 하고, 아직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일부 툭툭 던져지는 대사들과 드라마에 등장하는 책들의 내용들을 함께 분석해 나간다면, 작가의 의도를 어느정도 추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번 시즌에 가장 큰 관심을 모은 책은 바로 스티븐 킹의 '캐리'라는 책이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로스트 작가들이 아무생각없이 단순하게 그냥 넣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자유의지로 돌아와보자. 일단 이 자유의지에 대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바로 시즌 1에서의 로크와 시즌 2에서의 미스터에코이다. (개인적 예상으로는 아마 시즌 3에서는 그 인물이 줄리엣이 되지 않을까싶다.) 로크와 에코는 지속적으로 '예정'된 결과를 강조한다. 초자연적 기적을 겪으며 운명을 믿기도 하며, 언약의 성취를 실제 기독교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예정과 결과에 대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해치 안의 컴퓨터, 즉 숫자와 그에 관한 관찰로 볼 수 있겠다. 그들은 시즌2 마지막에 한가지 현상과 계시를 놓고 극명한 차이의 신앙을 보여준다. 결국 끝까지 '믿은' 에코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해치에서의 이 후 스토리를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결론은 내릴 수가 없겠다. 아무튼 이 둘은 끊임없이 현상과 계시를 찾으려 하고, 그에 따른 나름의 믿음으로 확고한 결정을 하려고 한다.

이를 기독교적 해석으로 접근해보면 이 섬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기적들과 계시, 그리고 예언들은 그들의 과거 행위와 기억에 대한 인과적 결과로서의 믿음을 통해 각자의 결론을 짓게 되고, 이는 서로간의 갈등과 외부의 공격에 의해 극대화가 되어 왔다. 어떻게 보면 게임 속의 존재들로도 보여질 수 있을 만큼 이들의 행동과 그 인과적 과정은 서로 치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또한 치밀하게 암시되어 왔다. 이는 분명 그들을 조종하거나 또는 실험하는 초자연적 절대자가 존재해야함을 보여준다. 만약 신적 존재라면 100% 완벽한 결과가 가능할 것이고, 한소 재단에 속한 자라면 어느정도 성취과정이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108이라는 숫자와 다르마(Dharma), 이집트 상형문자, 그리고 히드라에서도 나타나듯 세계 곳곳의 종교들이 서로 혼재된 가운데, 종교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본 절대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매트릭스 이후 처음이다.)

앞으로의 전개는 아마도 모든 스토리가 이 자유의지의 관점에서 크게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시즌 3일 수도 있고, 또는 4 이후로도 볼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시즌 1과 2에서 크게 부각되었던 몇몇 의문점들도 간단하게 해결하는 것을 볼 때,(상어에 찍힌 로고나, 숲에서 나타난 북극곰 등) 이러한 요소들도 그저 간단한 언급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지만, 숫자의 등장 이 후 엄청나게 넓혀져 버린 드라마의 전개 범위와, 등장인물들 간의 연계성, 그리고 계속 뿌려지는 계시와 결과들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고민과 의문으로 이끌어 갈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핵심은 여전히 로스트 제작진 들에게 달려 있으리라.


p.s

1.
이번 첫 에피소드의 키워드는 아마 '실험'이 아닐까 싶다. 잭과 소이어는 둘다 의심쩍은 한번의 탈출시도를 하게 된다. 물론 둘다 실패로 끝나며 무언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케이트는 피실험자의 가정(定)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참고로 제목인 A Tale of Two Cities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로서 다른 도시의 똑같은 두 남자와 그 사이의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섬에서의 스토리 보다는 잭의 회상에서 나타나는 부인과 다른 남자, 그리고 잭의 갈등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명절을 쇠고 와서 그런지 조금 정신이 오락가락 합니다. 글 내용이 엉망이군요.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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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 그리고 기독교

스물여덟의 책읽기 2006.09.26 11:52 Posted by 스물다섯

공산당선언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책세상

알라딘 책 리뷰 서비스인 Thanks to Blogger 라는 게 있길래 한번 테스트 삼아 해봅니다. ^^
수익은 기대하지 않고 있고, 다만 이 모델이 호감이 많이 갑니다. 아마 알라딘이 이 모델의 가장 큰 수혜자겠죠? ㅎㅎ 이를 통해 웹2.0에 맞는 많은 수익모델들이 창출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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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 그리고 기독교

Karl Marx, Friedrich Engels 공산당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A spectre is haunting Europe.

당시 유럽을 떠도는 것에 불과했던 유령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발전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 역사적 종교가 아닌 하나의 철학적 이데올로기가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빠져들게 한 사건은 20세기의 가장 큰 역사이자, 충격적인 현실이다.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학자들이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으로 세계대전, 독일 나치즘, 기타 세계화의 여러 사례들을 접어두고, 사회주의 혁명과 그 실패로 목소리를 모으는 것은 수세기 동안 간접적으로 역사적 흐름에 영향을 끼친 철학과 종교를 넘어서 철학자들에 의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그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산당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은 마르크스 철학사상의 결정체이다. 마르크스는 이 책을 통해 세계적인 사상가로 성장하였으며, 공동 저작자인 엥겔스(Friedrich Engels)조차도 이 사상이 전적으로 마르크스에 기반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을 볼 때, 현대 철학과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Karl Marx, Fredrich Engels, 진우 옮김 『공산당 선언』(서울; 책세상, 2002) pp.9~10, 역자서문의 내용 중 일부 참조, 인용)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계 역사를 뒤바꾼 한 독일 청년, 그리고 한국의 여러 이데올로기적 한계로 인해 우리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했던 그의 사상, 비록 이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철학과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대한 진실이 모두 밝혀지지는 않지만, 그의 핵심적 본질과 비판의 목적에 관하여 연구해 보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계급 투쟁의 결정적인 때가 다가오면 계몽된 부르주아 지식인 계층이 프롤레타리아의 대의에 공감하여 그들의 운동에 참여한다고 썼는데, 이 말은 바로 그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David McLellan, 정영목 옮김, 『마르크스』(서울; 시공사, 1998) p.15.) 그는 프로이센의 한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으며, 그의 사상에 기초하면 분명 부르주아 계급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헤겔의 철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그를 비판하고, 그의 관념론을 비난하고, 또 그의 변증법을 물구나무세우려고 애를 쓰기도 했지만, 자신의 방법론이 헤겔로부터 직접 뻗어 나온 것임을 인정한 최초의 인물이었다.(David Mclellan, p.36)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은 근원적으로 헬라 자연 철학 중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철저하게 세상을 어떠한 현상적 상태와 생성 과정 사이의 긴장을 부정의 힘(the power of the negative)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상호 모순된 기존 사회의 구조를 개혁하려는 시도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적 기반과 레닌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귀결된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철저하게 기독교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그 방법론적 기반은 유물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으며, 세상의 관념과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비존재적 가치로의 인식을 통해 인간의 역사와 현상적 상태를 기계론적 관점으로 비판한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그의 현실적 대안을 예로 들며 초기 기독교적 사상과 유사함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와 세계관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서,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후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공산당선언에 이은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통해 그의 사상과 철학을 조금 더 구체화 시켜 보면, 우선 소외론을 들 수 있다. 그의 『경제학-철학 수고』(1844)소외된 노동이라는 글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노동자의 전반적인 궁핍과 비인간화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는데, 이는 네 가지의 본질적 관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낯선 대상, 곧 노동자를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대상인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의 관계", 즉 노동자가 낯선 물건과 관계를 맺듯이 자신의 노동 생산물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둘째, "노동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생산행위에 대한 노동의 관계", 즉 생산이라는 활동자체가 노동자에게 행복이 아닌 고통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노동은 "자유롭고 총체적인 인간의 유적 능력까지도 인간의 개인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화시킨다." 넷째,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명활동,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데서 초래되는 직접적 결과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이다.(David Mclellan, p.48) 이와 같이 소외론은 마르크스의 인간 본연에 대한 철학적 연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의 철학적 소고가 이데올로기적 가치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자본주의의 실패를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또 하나의 핵심적 사상으로 앞서 언급한 변증법적 유물론사적 유물론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저작과 사상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나 엥겔스의 사상과 레닌의 현실적 적용이 발전한 것으로서,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그의 스승인 헤겔의 사상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직접적으로 사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은 없지만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이라고 불렀던 그의 관점에 따르면, 역사를 이해하는데 본질적인 요소는 인간의 생산 활동의 파악이라는 생각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노동에 의한 창조를 제외한 철학, 정치, 종교적인 것들은 2차적인 요인일 뿐이며, 철저하게 변증적 투쟁을 통한 계급적 모순을 해소하는 것으로 노동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논의는 노동 가치론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양에 의해 측정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잉여가치가 생겨남으로써, 가치의 불균등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의하여 결국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노동자 계급의 지배에 의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주장을 일부 살펴보았다. 사회주의의 발전과정과 여러 변용, 그리고 그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기에는 본 글의 목적과 한계가 분명하므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과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몇몇 기독교 학자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접목하려 한다. 극단적인 예로, 유물론에 근거를 둔 마르크스주의가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이라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분명 그 학문적, 신앙적 전개과정을 철저하게 오해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에 대한 반론은 사람의 지혜나 지식을 통하여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함영훈, 김정우, 기독교인으로서 사회과학하기:기존 방법론에 대한 개혁주의적 관점을 통한 비판적 논의를 중심으로 (한동대학교 기독학술대회, 2005), p.9를 참조.)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세계의 본질적 모순에 대한 해결을 찾으려고 하였고, 이러한 고민은 계속적으로 기독교와의 갈등을 유발하며 대립하여 왔다. 이는 분명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인 오해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오해 가운데 쌓인 불신과 모순에 대한 갈등이 극대화 된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라고 볼 수 있다. 다시 공산당선언으로 돌아와서 보면, 그의 종교, 즉 기독교에 대한 평가를 알 수 있다.

고대 세계가 막 몰락하려 했을 때, 고대 종교들은 기독교에 정복당했다. 기독교적 이념이 18세기 계몽 이념들에 패배했을 때, 봉건 사회는 당시 혁명적이었던 부르주아지와 생사를 건 한판 싸움을 벌였다. 양심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라는 이념들은 단지 지식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자유 경쟁의 지배를 표현할 뿐이다.(Karl Marx, Fredrich Engels, p.41.)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와 함께 종교의 절대성을 철저히 부정했으며, 종교적 발전과정도 철저하게 인본주의 유물론적 관점에 의한 변증적 발전으로 보았다. 비록 개신교로 개종한 유태인 집안 출신의 그였지만,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부르주아 계급 또는 사회적 모순에 의해 이용당하는 하나의 인간의 사상에 불과한 것이다.

지난 세기 말,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실패한 이념이 되었던 마르크스의 사상이 최근 신자유주의의 극단적인 성장, 시장실패, 자본주의 윤리의 붕괴 등으로 인해 새롭게 논의되고 있다. 이미 유럽의 경우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그 실험을 마친 상태이며, 개량, 수정된 여러 분파들과 제3의 길 등이 맹목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미 120여년 전에 죽은 마르크스이지만 여전히 그의 사상은 살아서 역사하고 있으며, 세상의 갈등과 대립에 대한 해결로써의 종교(기독교)를 철저하게 비웃고 있다. 열방의 기독교인이 하나됨을 외치지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은 더욱더 큰 영향력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그들의 사상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에 의한천국에 가장 가까우며, 이는 기독교의 역사적 과정으로 볼 때, 가장 위협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얻어야 할 세계가 있고, 그들의 결심은 확고하며, 절대 죽지 않는다.

공산당은 오늘도 계속 선언되고 있다.



공산당선언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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